퇴직연금 중도인출, 왜 늘어나는 걸까?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퇴직연금 중도인출, 왜 늘어나는 걸까?

글 : 조성환 / 산업정책연구원 연구교수, 경영학 박사 2025-12-17

한국의 퇴직연금 시장에서 매우 심각한 변화가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바로 중도인출의 급증이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퇴직연금 중도인출 금액은 2020년 1조 9천억 원에서 2023년 3조 1천억원으로 3년간 63% 증가했다. 특히, 40대의 인출 비중이 36%로 가장 높아, 퇴직연금이 본래 목적을 상실한 채 “주택자금과 의료비를 충당하는 비상금”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중도인출의 증가는 개별 가계 문제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향후 한국 연금시장의 구조적 리스크, 더 나아가 국가재정 리스크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40대 중도인출 폭증하는 이유


중도인출 사유 중 주택구입 및 전세 관련 인출 비중이 63%이고, 의료비 관련 인출 비중이 11%이다. 이는 퇴직연금이 사실상 ‘주택구입 및 전세자금 마련을 위한 대체 재원’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의미다. 전세금 급등, 대출 규제로 인한 자금 압박, 주택가격 상승이 결합되면서 40대 가계는 퇴직연금을 ‘즉시 현금화 가능한 자산’으로 인식하고 있다. 


문제는 여유자금이 없어서 중도인출을 하다 보니 중도인출 이후 재추가 납입률이 미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한 번 빠져나간 연금자산은 사실상 복구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40대의 퇴직연금 잔액 곡선은 축적이 아닌 소진 경로를 그리게 된다.


한국의 퇴직연금은 구조적으로도 취약하다. 2024년 5월에 발표된 고용노동부·금융감독원 보도자료에 의하면 연금수령자의 계좌당 평균 금액은 1.4억인데 반해 일시금 수령자의 계좌당 평균 금액은 1,600만원에 불과하고, 전체 평균 금액은 2,900만원이다. 


연금 형태 보다 일시금 수령자의 수가 월등히 많다는 것과 더불어 계좌당 적립금액이 노후생활자금으로 활용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퇴직연금 적립금은 2024년말 기준 431조로 전년 대비 12.9%가 증가했고, 현 추세대로 간다면 2034년경에는 약 1,042조원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에 계좌당 적립금 상황은 달라서, 한국금융연구원은 이렇게 중도인출이 계속된다면 2035년 은퇴세대의 평균 적립금이 1,500만 원 이하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그리고 OECD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회원국 전체의 퇴직연금 자산은 2024년말 기준으로 약 61.5조달러로 집계됐는데, 이는 GDP 대비 92.4% 수준이라고 한다. 반면에 한국은 GDP 대비 31.9%에 블과하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이 35~40%에 그치는 현실에서 중도인출로 인하여 퇴직연금마저 쌓이지 않는다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노후 빈곤이 확산되는 나라가 되게 된다.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구조


중도인출이 늘어나는 것을 개인의 “절약 의지 부족”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구조적으로 중도인출을 유도하는 환경이 고착화되어 있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이다.


주택 가격 상승·전세금 급등이 핵심 요인


전세금은 지난 10년간 지역에 따라 40~80% 상승했다. ISO(국제표준화기구) 기준 주거비 부담률은 20%가 적정선이지만, 한국의 30~40대는 35~45% 수준에 이른다. 결국 ‘대출규제 + 고금리 + 전세금 상승’이 결합되면서 퇴직연금이 주택자금으로 흘러가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


의료비 부담 증가


한국의 비급여 의료비 부담은 OECD 평균의 2.5배 수준이다. 40대~60대 가구 의료비 지출은 지난 10년간 64% 증가했다. 퇴직연금이 의료비 비상금이 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높은 예금 비중, 초라한 수익률 


한국 퇴직연금의 자산 배분은 원리금 보장형 비중이 70~80%로 OECD 평균 30% 보다 훨씬 높아서 장기 복리 효과가 극히 낮게 나타난다. 2024년 11월에 발표된 한국퇴직연금개발원의 자료에 의하면 최근 10년간 퇴직연금의 연평균 수익률은 2.07%로 나타났다. 수익률이 낮으니 연금자산이 작아 보이고, 연금자산이 작아 보이니 쉽게 중도인출이 늘어나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것이다.




중도인출, “대체자금 공급 구조”가 핵심


중도인출을 막는 것도 방법의 하나이겠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은 아니다. 퇴직연금을 건드리지 않도록 대체 자금을 공급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미국 FHA·HSA 모델 도입


필자는 주택과 헬스케어 정책 전문가는 아니다. 그러나, 단순히 주택관련 대출을 풀었다 막았다하는 것보다는 미국 연방주택청의 “FHA형 주택 구입 지원 계좌”나 건강보험 외에 “건강 저축 계좌(HSA. Health Savings Account)”와 같은 의료비와 장기 요양 비용을 대비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연금을 건드리지 않고도 주택·의료비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참고로 HSA는 불입 시 소득공제, 투자수익은 비과세, 인출 시 의료비 목적으로 사용하면 전액 비과세된다고 한다. 


디폴트옵션 고도화


퇴직연금 수익률이 낮아서 적립금이 작아 보이지 않도록 디폴트옵션을 선택이 아닌 기본값으로 해야 하고, 디폴트옵션에서 예금과 같은 초저위험형은 제외하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 디폴트옵션 도입 이후 가입률이 확대되고 있지만, 대부분 예금과 같은 저위험형 쏠림 현상이 나타나다 보니 디폴트옵션 도입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연금계좌의 ‘중도인출 조건’ 강화 및 연금수령 시 세제혜택 강화


연금은 노후생활자금이라는 목적 자산이라는 인식을 강화하려면, 중도인출 사유를 축소하거나 인출시 추가 패널티의 부과, 연금수령시 과감하게 비과세 처리하는 등 세제혜택강화 등의 조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인출에 대한 조건을 강화하는 것은 당장의 자기 자산에 대한 자율권을 훼손하는 것으로 가입자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안정된 노후생활의 안전판이 될 것이다.


자산관리 전문가들은 연금 중도인출을 “노후자산에 가장 치명적 의사결정”으로 평가한다. 퇴직연금 중도인출은 개인의 현금흐름 문제로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한국 노후대비 시스템 붕괴의 선행 지표다. 지금의 40대가 은퇴할 20~25년 뒤, 이들은 국민연금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는 세대로 은퇴하게 방치하면 안 된다. 


한국의 퇴직연금 문제는 단순한 금융교육 차원이 아니라 주거비와 의료비 구조, 장기투자 환경, 연금제도 설계가 동시에 얽혀 있는 시스템적 문제다. 중도인출이 필요 없는 경제·세제·금융 환경을 설계하는 것, 그리고 퇴직연금이 본래 설계대로 장기 복리 자산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제도적 개혁이다. 이 과제가 해결된다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되는 나라에서, 가장 빠르게 노후를 대비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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