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화가이자 미술 투자자였던 피카소의 안목
글 : 방현철 / 조선일보 기자 2025-07-21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살아생전에 백만장자였다. 백만장자는 부자 문턱을 넘어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재산이 100만 달러, 우리돈 13억원 이상인 사람을 가리킨다. 영국의 저명한 미술평론가 존 버거는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란 책에서 “피카소는 28살 때부터 돈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38살에는 이미 부자였다. 65살부터는 백만장자였다”고 했다.
피카소의 재산이 얼마나 됐는지는 1973년 아흔 살이 넘은 피카소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유산을 둘러싼 상속인들의 소송 과정에서 드러났다. 그가 남긴 재산은 유화 1885점, 조각 1228점, 소묘 7089점, 판화 3만점, 도자기 322점 등 미술품만 4만5000점에 달했다. 그뿐 아니라 성(城) 두 채와 집 세 채, 그리고 현금 450만 달러, 금괴 130만 달러어치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당시 그의 재산이 2억5000만 달러(약 3440억원)에 달한다는 평가가 나왔다.
피카소가 원래 갑부집 아들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1881년 스페인 남부 말라가에서 미술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20대 초반 피카소는 자신의 재능을 큰물에서 평가받고 싶어, 당시 유럽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파리에서 한때 그는 침대가 하나뿐인 방에서 친구이자 시인인 막스 자코브와 살았다. 자코브는 낮에 근처 가게에서 일하고 밤에는 잠을 잤다. 피카소는 낮에는 한 개밖에 없는 침대에서 자다가, 밤에 자코브가 오면 그림을 그렸다.
그러던 그가 백만장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피카소는 재능이 뛰어났다. 더 나아가 재능을 재산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피카소는 자신이 잘 아는 분야인 미술 시장에서 네트워크를 만들었고, 그 네트워크를 활용해 미술품에 투자해 갑부가 됐다.
피카소는 예술가인가, 사업가인가?
피카소가 20세기 초 새로운 미술 사조인 입체파의 대표 주자로 이름을 알린 그림은 ‘아비뇽의 처녀들’이다. 그가 그림을 완성한 때는 1907년. 그런데 주변의 혹평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이 그림을 자기 화실에 계속 보관하다 1924년이 돼서야 유명 패션 디자이너 자크 두세에게 3만 프랑, 지금 우리 돈 4000만원 쯤에 팔았다. 그림 가치가 오를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마치 당시 파리의 화상들이 인상파 그림을 사들여 20~30년쯤 보관했다가 시장에 내놔 큰돈을 벌었던 것과 비슷하다. 피카소는 파리의 유명 화상들과 교류하면서 인상파 그림이 장기간에 걸쳐 가격이 올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화상들은 시장에 나오는 그림 물량을 조절하면서 재산을 불리고 있었다. 피카소도 그들처럼 장기간 기다리며 시장 공급 물량을 조정해 재산을 불렸다. 피카소가 유산 중 60% 정도가 유화, 조각 등 미술품이었다.
피카소는 자기가 잘 아는 거장 화가들의 그림을 수집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게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의 그림들이다. 피카소는 ‘책 읽는 여인’이라는 르누아르의 그림을 갖고 있다가, 1918년 1차 대전 즈음 생활이 어려워지자 화상에게 이 그림을 팔기도 했다.
피카소가 갖고 있던 다른 화가들의 그림은 상속세를 내는 데 쓰이기도 했다. 소위 ‘피카소 컬렉션’이라고 불리는 그림은 르누아르뿐 아니라 마티스, 세잔, 드가, 브라크 등 당대 유명 화가들 것이다. 피카소 사후 프랑스 정부는 2억5000만 달러에 달하는 그의 재산에 상속세 20%를 매겼는데, 약 500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하지만 피카소 유족들은 그가 생전에 수집했던 다른 유명 작가들의 그림과 피카소의 그림으로 상속세를 냈다. 이 그림들은 현재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을 만드는 모태가 됐다.
피카소는 미술과 돈과 성공에 대한 생각이 다른 화가들과 달랐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성공이 중요한 것인가?
예술가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예술에 대한 사랑으로 일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성공을 경멸한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예술가는 성공이 필요하다.
생존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일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성공을 위해 매진했던 피카소 스토리는 그보다 28살 많은 유명화가 빈센트 반 고흐와 완전히 달랐다. 고흐는 생전에 그림을 거의 팔지 못했다. 하지만 피카소는 성공을 위해 화상, 수집가들을 찾아다니며 네트워크를 만들고 그림도 팔았다. 그레고리 번스 미국 에모리대 교수는 ‘아이코노클라스트(상식파괴자)’라는 책에서 고흐와 피카소 모두 상식을 파괴한 예술을 했지만, “고흐는 사람들에게 호의적이지 못 했지만, 피카소는 사교적인 ‘인간자석’이었다”며 피카소의 성공 요인을 네트워킹 능력에서 찾았다.
‘아는 것에 투자하라’
피카소 작품의 수익률은 얼마일까. 그림의 수익률은 따지기가 상당히 어렵다. 똑같은 그림이 거래되는 일이 적고, 사람마다 작품을 평가하는 취향도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비싸게 봐도, 다른 사람은 그 정도 가치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저명한 경제학자 윌리엄 보몰은 “미술품 가격은 어떤 펀더멘털(기초)에도 묶이지 않고, 방향성을 알 수 없이 출렁인다”고 했다. 당연히 수익률을 계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경제학자들은 피카소 그림의 투자 수익률을 계산했다. 피카소 그림은 물량도 많고 자주 거래되기 때문이다. 제임스 페산도 토론토대 교수 등이 1977~2004년 경매 기록으로 피카소 그림 가격 상승 폭을 계산했더니 명목 가격이 7배로 올랐다. 이는 연평균 수익률로 환산하면 약 7.8%에 해당한다. 전체 미술품 가격의 움직임을 측정하는 소더비 메이 모제스 아트지수라는 것도 있는데, 이 지수는 1950~2021년 연평균 8.5% 상승했다. 같은 기간 미국의 대표 주가지수 S&P500이 10.3% 오른 것보다는 낮지만, 괜찮은 수익률이라고 할 수 있다.
피카소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미술품에 투자해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었다. 주식 투자의 거장들도 자기가 잘 아는 것에 투자하라고 했다. 1977~1990년 펀드운용사 피델리티에서 마젤란 펀드를 운용하면서 연평균 29.2%의 수익률을 낸 피터 린치는 “아는 것에 투자하라(Buy what you know)”고 했다. 실제 그는 주변에서 익숙한 제품을 만드는 회사를 발굴해 투자했다.
그는 던킨도너츠, 타코벨 등 익숙한 브렌드에 투자했다. 그는 자신의 첫 책 ‘전설로 떠나는 월가의 영웅’에서 던킨도너츠에 투자하게 된 얘기를 꺼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을 보고 던킨도너츠를 알게 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이 던킨도너츠에서 커피를 마시고 그 맛에 감동하고 나서 실제 던킨도너츠 지점들이 항상 바쁘고 장사가 잘 된다는 걸 확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던킨도너츠의 재무제표를 분석하고 투자를 결정했다고 했다.
투자의 현인으로 불리는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도 마찬가지 얘기를 했다. 소위 ‘능력 범위(circle of competence)’란 개념이다. 능력 범위란 투자자가 자신의 지식, 경험, 전문성을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투자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개념이다. 버핏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 하는 비즈니스에 투자하지 말라”, “10년 보유할 주식이 아니면 10분도 보유하지 말라”는 말도 했다.
피카소는 화상, 수집가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어 미술 시장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해서 잘 알고 익숙한 미술품에 투자했다. 물론 피카소는 좋은 그림을 보는 차별화된 안목도 있었다. 그리고 장기 투자에서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평범한 투자자들도 피카소에게 배울 점이 많다.
방현철 조선일보 기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해 한국은행 은행감독원(현 금융감독원)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현재는 조선일보 경제부 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편집부, 사회부, 주간조선부, 국제부, 사회정책부 등에서 일했으며 논설위원으로도 있었다. 서울대학교 국제지역원(국제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를 마치고, 한양대학교에서 ‘통화정책과 글로벌 임밸런스에 관한 연구’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부자들의 자녀교육』, 『중앙은행의 결정적 한마디』, 『J노믹스 vs. 아베노믹스』, 『코로나 화폐 전쟁』 등이 있으며, 번역서에 『직장인을 위한 행동경제학』, 『머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