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잘 나가던 빌런들, 어디에 갔을까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그 시절, 잘 나가던 빌런들, 어디에 갔을까

글 : 한혜경 / 작가, 前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2024-06-10

오랜만에 전 직장의 동료들과 만난 자리였다. 가장 최근에 은퇴한 P씨에게 ‘은퇴하니까 뭐가 제일 좋은가?’ 질문이 쏟아졌다. P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좋은 건 꼴 보기 싫은 사람들, 아 요즘엔 그런 사람을 ‘빌런’이라고 부르던데, 빌런들을 안 만나도 된다는 점이죠.”


그의 대답에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 한마디씩 했다.


“아, 정말 그래. 그때는 왜 그렇게 이상하고 독특한 사람 투성이었는지....”


“아주 파란만장했죠. 매일매일 지뢰밭을 걷는 기분이랄까?”


그러곤 당시에 모든 구성원을 힘들고 피곤하게 했던 ‘빌런 중의 빌런’, A가 도마 위에 올라왔는데, 그가 했던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 이간질 등에 대해 ‘고의였을 것’이라는 평가와 ‘설마, 뭘 모르고 그랬겠지’라는 평가가 엇갈렸다. 하지만 A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모처럼의 소중한 만남을 과거의 빌런 이야기로 채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L씨가 말했다. 


“그런데, 신기한 건 남을 힘들게 하던 빌런일수록 시야에서 빨리 사라진다는 점이에요. 참 이상하죠? 빌런들이 오래 잘나갈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아요. 어느 날 갑자기 없어진다니까요.”


L씨의 말에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는 반응이 다수였다. 나도 그랬다. 현역일 때도 한두 번 느꼈지만 은퇴한 후에도 바쁘게 살다가 어느 날 주변을 둘러보곤 아니 이게 웬일인가? 그 많던 빌런들이 다 어디로 갔나? 놀란 적이 여러 번이다. 빌런들이 있기는 했나? 혹시 내가 빌런이었나? 기억력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지금도 어렴풋이 떠오르는 건 내게 끊임없이 안테나를 세우고 나를 평가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리고 매사에 지나치게 솔직하고 직설적인 사람들이 꽤 많았다는 점이다. 위선이나 이중성보다 더 부담스러운 건 지나친 솔직함, 지나치게 앞뒤가 같은 언사라는 걸 깨달으며 절망했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L씨가 말한, ‘빌런들이 사라졌다’는 말은, 은퇴와 함께 빌런들이 내 눈에서 멀어지고 세월과 함께 빌런들에 대한 나의 기억이 흐려진다는 것 이상의 이야기였다. 그보다는 빌런들의 ‘생명력’이 의외로 길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가 말했다. 


“혹시 나만 그런가요? 주위를 둘러보니까 착한 사람들만 남은 거 있죠?”


‘착한 사람만 남았다’는 그의 말에 모두 격하게 동의했다. 모진 세상풍파를 겪은 때문이지, 아니면 세월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정신을 차려 보니 남을 괴롭히고, 에너지를 뺏어가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착한 사람들만 내 눈에 띤다는 이야기였다. 


모두 한마디씩 거들었다. 


“당연하지. 빌런들의 전화는 받지 않고, 착한 사람들 전화만 받으니까.” 


“난 내가 착해져서 착한 사람만 보이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이쯤 해서 애덤 그랜트의 책, <기브 앤 테이크>가 떠오르지 않는가. 강하고 독한 사람이 성공하고 모든 것을 가져간다는 ‘승자 독식’의 명제를 뒤집은 것으로 유명한 책 말이다. 우리는 흔히 ‘남에게 베풀기보다 자기 이익을 먼저 챙기려는 사람(taker)’이 성공하고, ‘자신의 이익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람(giver)’은 이용만 당하다가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은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람은 큰 성취를 이뤄내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보다는 누군가를 돕고,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며, 남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양보하고, 조건 없이 베푸는 ‘기버’가 장기적으로 가장 강력하고 생산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점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즉 단기적으로는 남의 희생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사람이 여러 모로 유리해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착하고 이타적인 사람이 훨씬 더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아무튼 요즘 내 주변에도 착하고 친절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얼굴 붉힐 일도 줄어들고, 나까지 덩달아 순해지고 착해지는 기분이다. 지독한 비교와 경쟁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해준 은퇴가 가져다준 선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 주변의 착하고 친절한 사람들은 ‘성공’에는 큰 관심이 없다. 최근에 자주 만나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콘서트도 함께 다니는 S씨에게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했다.


“아이고, 성공은 무슨 성공이요? 평생 집에서 밥하고 집안일만 하던 사람인데 성공이 가당키나 한가요?”


하지만 성공이 별건가. 평생의 꿈이었다던 자기만의 공간을 마련한 후에 아무 조건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공간을 제공하고, 갈 때마다 맛있는 간식도 준비해주는 등 친절을 베풀면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S씨의 인생이야말로 성공적인 인생 아닌가.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 자신도 행복해진다고 말하는 그를 볼 때마다 존경스럽다. 전에는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그렇게 좋아 보이더니 요즘엔 친절하고 남을 돕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몇 배나 더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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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부쩍 이런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 ‘빌런’으로 기억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지고 마는 그런 삶을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길다고. 이왕이면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 친절한 말 한마디 건네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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