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가사노동 고수된 남자들, 이들의 속사정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은퇴 후 가사노동 고수된 남자들, 이들의 속사정

글 : 한혜경 / 작가, 前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2024-04-22

최근에 만난 은퇴남 L씨와 K씨는 자칭 ‘가사노동의 고수’이며 특히 요리에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웬 허세인가, 싶었는데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렇지만도 않았다. L씨의 아내가 좋아해서 자주 만든다는 두부조림의 레시피는 아주 구체적이었고, 집에 와서 직접 만들어보니 맛도 좋았다. 하지만 이들은 가사노동의 고수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아내에 대한 생각이나 태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L씨는 은퇴하기 전부터 쭉 가사노동을 전담해오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의 아내는 L씨보다 바쁘기도 했지만 요리에는 통 관심이 없고, 퇴근해 오면 L씨에게 “오늘 저녁 메뉴가 뭐냐?” 고 물을 정도라고 한다. L씨는 다행히도, 그런 아내에게 별다른 불만이 없고, 대부분의 집안일을 자기 일로 여기며 살고 있다고 한다. 단지 부부 동반 모임 같은 곳에 가서 자기 부부가 사는 이야기를 하면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는 걸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며, 그럴 때마다 자기네가 특별한 경우인가, 생각한다고 했다.


그에 비해 K씨는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아내에게 배신감을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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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씨는 오랫동안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왔다고 한다. 아내가 능력이 있으면서도 ‘경단녀’로 살면서 온갖 집안일로 힘들어하는 걸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은퇴하면 딴 건 몰라도 가사노동만은 확실하게 도와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K씨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은퇴한 직후부터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런데, 글쎄, 제가 의외로 가사노동에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친구들 만나 하릴없이 시간 보내는 것보다 시장보고 집에서 요리하는 게 더 재미도 있고, 무엇보다 제가 생각보다 요리 솜씨가 좋아서 저도 놀랐다니까요.”


웃음이 났다. 그렇다면 다행 아닌가. 은퇴 후에 집안일도 하며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뭐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하나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집사람이죠. 내가 집에서 잘 지내고 요리도 잘하는 걸 보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매일 밖으로 나도는 거예요. 자기는 그동안 지겹도록 집안일 많이 했으니 이제부터는 당신이 알아서 하라고 하면서 친구들 만나고, 놀러 다니고.... 나는 집에서 밥하고 청소하고, 글쎄, 아들 밥도 내가 차려준다니까요.”


내가 물었다.


“그래도 요리나 집안일이 재미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능력도 있으시다고...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가요?”


K씨가 대답했다.


“글쎄요.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그렇죠. 하지만 모종의 배신감이랄까, 뭔가 손해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요. 내가 가사노동을 맡아 하는 건 어디까지나 은퇴 후에 부부가 사이좋게 지내자는 뜻인데, 집안일은 나한테 다 맡기고 자기 혼자만 놀러 다니는 건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닌가요?”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집사람은 말끝마다 내가 이기적이고 자기가 피해자인 양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여자들이 더 이기적이예요. 아니, 집안일이 얼마나 고단한지, 얼마나 고립감이 느껴지는지 그렇게 잘 알면 가끔은 내 밥도 신경 써주고 그래야 하지 않나요?.... 아무튼 여자들이 훨씬 이기적이라니까. 점심 시간에 좋은 식당 가보면 다 여자들이잖아요. 남자들은 힘들게 일해서 가족한테 다 바치고 자신을 위할 줄은 모르는데, 여자들만 재밌게 사는 것 같아서 얄미워요.”


어느 틈에 K씨의 공격 대상은 아내로부터 여자 전체로 확대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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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항상 ‘밥’이 문제다. 주변을 둘러보면 밥 때문에 싸우는 부부, 밥 때문에 실버타운에 들어가는 부부가 한둘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루에 한 끼만 먹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자칭 가사노동과 요리에 자신 있다는 남자들도 이러하니 부엌에 들어가는 일, 냉장고 문을 여는 일조차 부담스러워하는 은퇴남들의 사정은 어떠할까.


오래 전에 일본 작가 사하시 게이조가 지은 <할아버지의 부엌>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집안일은 여자만이 하는 것으로 알고 83년간 살아온 할아버지가 아내의 죽음 이후 스스로 집안일을 배우면서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린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 노년에도 홀로서기가 필요하다는 깨달음과 함께, 남자들에게 부엌일을 통한 홀로서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낄 수 있다. 특히 책 뒷부분에는 이 책의 출판 후 일본 각지에서 날아온 독자 편지를 통해서 늙어서 밥 짓고 빨래하면서 혼자 살아가는 80~90대의 ‘부엌할아버지’들을 작가가 직접 만나서 취재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어 흥미로웠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왜 꼭 ‘할아버지’의 부엌이어야 하는가? 부엌은 인생의 어느 시기에도 중요한 곳이다. 이 책의 할아버지처럼 아내가 죽은 후 홀로 되어서만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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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도 일생 부엌과 친해져야 하며, 어느 정도의 요리 실력까지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닥치면 그때부터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 심정을 이해는 하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이 점에서 L씨와 K씨는 집안일과 요리라는, 중요한 일상의 능력을 갖춘 남자들이다. 이들의 은퇴 생활은 한결 능동적이고 주체적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비록 K씨가 아내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아닐까. 이런 가정에 황혼이혼이란 없을 것이다. 설사 이혼하거나 부인과 사별한다 해도 이런 남자는 덜 불쌍하다. 혼자 시장 봐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으니 시간도 빨리 가고 하루가 즐거울 것이다. 가끔 혼자 먹는 게 너무 쓸쓸하게 느껴질 때면 점심 혼자 먹는 친구들을 초대해 보는 건 어떨까. 여자들이 좋은 식당에서 점심을 즐기는 것 이상의 재미가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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