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인생이란 소꿉장난이구나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그래서 인생이란 소꿉장난이구나

글 : 이근후 /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2023-02-10

“나는 엄마 할게, 너는 아빠 해라.” 어느 날 한가하게 소파에 앉아있다 문득 어릴 때 소꿉장난하던 추억이 떠올랐다. 


이런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것은 내가 현직 교수로 일하며 대한신경의학회 부회장 역할을 맡았을 때다. 그때 회장은 서석조(1921~1999) 교수님으로 지금의 순천향병원을 비롯해 순천향대학교를 설립하신 분이다. 


그때 우리는 매달 임원회의가 끝나면 인근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반주로 술이 몇 순배 돌고 나면 회장님은 가수 이선희의 J에게(1985년, 이세건 작사·작곡)란 노래를 열창했다.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어린 시절 소꿉장난으로 엄마, 아빠 놀이를 하던 때를 떠올렸다. 소꿉장난에서 엄마 역할을 했던 추억의 그녀의 성씨 이니셜이 ‘J’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손자, 손녀가 당시 나만 한 나이까지 자랐을 때 내 소꿉장난했던 경험을 들려 주고, 그들의 반응을 살폈다. 손자와 손녀들 반응을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요즘 아이들은 그런 소꿉장난 같은 건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정도 나이면 실제 이성친구로 사귀거나 미래를 약속하는 아이들이 많다고 했다. 아이들 반응을 보며 세월이 많이 흘렀고, 세상도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반응은 엄마 역할을 했던 분이 할아버지의 첫사랑인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별로 동감하지 못했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한 번도 만나 본 일이 없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어찌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는 어떤 소꿉장난을 하며 살아야 할까


세 번째 반응은 엄마 역할을 했던 분이 할아버지가 의사가 되는 데 영향을 준 것 같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소꿉놀이 속 엄마로부터 책을 한 권 선물받았는데, 책 내용은 주인공이 모든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고 결국 의사가 되었다는 그런 내용인 것 같다. 어쩌면 이 책이 내가 의사가 되는 시발점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생각에, 내가 의사가 된 동기는 다른 데 있다. 어릴 적 나의 실제 어머니는 항상 병약했고, 그래서 어른이 되면 꼭 의사가 되어 어머니를 돌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번은 어머니의 병이 위중해 한밤중에 왕진을 청하러 갔다가 거절당하고 돌아온 기억이 있다. 당시 좌절감을 이기지 못해 되돌아오는 길에 눈물을 흘리면서 “어른이 되면 꼭 의사가 될 테야”라고 결심했다. 내 기억은 이러한데, 소꿉장난을 했던 연령의 손자와 손녀들이 내 이야기를 듣고, “할아버지는 이랬을 거야”라고 상상하는 것이 조숙하다.


정신분석학이나 정신치료에서 기본으로 삼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아동기의 감정 양식이다. 이런 가설을 손자, 손녀들이 알 턱이 없을 터인데, 듣고 보니 손자와 손녀들의 말이 더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 이후부터 나는 종종 J를 궁금하게 여겨 떠올리기도 하고 수소문을 해서 만나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인연이 닿지 않아 만나지는 못했다.


어릴 때 소꿉장난은 비록 부모를 모방하는 비현실적인 놀이이긴 하지만 중년의 실제 삶을 아주 유사하게 흉내 낸다. 하지만 분명 다른 것이 있다면 어릴 때와 달리 중년의 소꿉장난은 실제 상황이라는 점이다. 실제 부부가 되고, 자녀를 낳고, 자녀를 양육하고 하루하루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부지런히 직장에 나가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어릴 때 했던 엄마, 아빠 놀이와는 상황이 다르다. 중년의 내 삶은 하루하루가 생소하고 모든 것이 낯설고 급급했다.


이제 자녀들은 장성해 가정을 꾸미고, 손자와 손녀를 낳고, 그들 나름의 실제 소꿉놀이를 즐기고 있다. 나도 중년의 소꿉장난에서 벗어난 지 한참이 지났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어떤 소꿉장난을 하며 살아야 할까? 몸도 쇠약해지고, 눈도 어두워지고, 귀도 어두워진 두 영감 할머니, 할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이런저런 옛날 얘기를 들추어내는 모습을 보면서 손자와 손녀들이 박장대소를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서로 동문서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코미디 같은 장난이 바로 노인들의 소꿉놀이다. 그래서 인생이란 소꿉장난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일생을 살면서 세 번의 소꿉장난을 한다


일생을 살면서 각기 다른 형태로 세 번의 소꿉장난을 한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엄마, 아빠 놀이가 첫 번째 소꿉장난이었다면, 두 번째는 어른이 되면서 실제 상황 속에서 허겁지겁 살아온 소꿉장난이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코미디와 같은 노인들의 소꿉장난을 하며 살고 있다. 통틀어 생각해 보면 그때그때의 소꿉놀이의 규모와 질만 달라졌을 뿐 그 내용은 비슷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지금은 허겁지겁하는 현실 상황의 소꿉장난에서도 벗어난 지 한참이 됐다. 그렇기에 틈틈이 그 옛날 엄마, 아빠 놀이를 했을 때를 돌이켜보는 게 즐겁다. 


인간은 같은 시간에 두 가지 다른 삶을 살 수 없다. 따라서 우리 삶은 각자가 만든 독특하고 유일한 소꿉놀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은 철없는 엄마, 아빠 놀이에서 시작해 종국에는 코미디처럼 동문서답을 하는 엄마, 아빠 놀이로 종지부를 찍으니, 가히 소꿉놀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겠다.


인생을 소꿉놀이에 비추어 한 번 더듬어 생각해 보다가 이용복의 ‘어린시절’이라는 노랫말을 흥얼거려본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시절에 눈사람처럼 커지고 싶던 그 마음 내 마음….” 아마도 그 커지고 싶은 마음속에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었나 보다. 내 어린 시절 소꿉놀이 속 엄마도 지금의 나처럼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남편과 함께 소파에 앉아 동문서답을 하는 코미디언이 되었을지 누가 알랴. 그래서 문득문득 보고 싶어지는 엄마다.





출처: 투자와연금 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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