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취업에는 명문대 졸업장이 소용 없다
글 : 김경록 /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2022-11-15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하고 난 후의 재취업 시장은 중고차 시장의 특징을 갖고 있다. 낡았거나 쓸모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관리를 잘 한 좋은 중고차와 그렇지 않은 나쁜 중고차가 비슷한 취급을 받듯이, 직장에서 좋은 위치에 있었더라도 물러나면 그냥 원 옵 뎀(one of them)이 되어 버린다.
비유를 들어, 은퇴자의 능력을 1~10으로 레벨을 나누어 보자. 현직에 있을 때는 이에 맞게 모두 다르게 평가되는 데 반해 퇴직 후에는 ‘낮음(1~2레벨), 중간(3~8레벨), 높음(9~10레벨)’ 정도로 평가받는다. 그러다 보니 ‘높음’에 해당하는 사람은 차별적으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지만 3~8레벨은 대충 도매금으로 비슷하게 평가받는다.
공무원으로 퇴직한 친구가 해 준 얘기다. 해외 근무할 때 대사가 한 분 있었는데 퇴직 후 별다른 소식이 없다가 몇 년 전에 만났는데, 번역일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또 한 명은 행정고시에 합격해서 공무원으로 근무했는데 1급으로 퇴직 한 후 65세에 감정평가사 자격증을 따게 되었다는 것이다. 7년 동안 눈이 아파 잘 안 보일 정도로 공부를 했다. 친구의 말인 즉, 퇴직하고 나니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도긴개긴이 되더라는 얘기였다. 자신은 레벨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노동시장에서는 그냥 뭉뚱그려 중간 레벨로 보는 것이다. 무엇보다 뼈아픈 건, 그에 걸맞게 소득도 뚝 떨어지게 된다.
우치다테 마키오의 소설 <끝난 사람>은 중고차 시장에서 벗어나려고 좌충우돌하는 퇴직자의 이야기다. 도쿄대 법대를 나와 은행에 취업해서 임원을 노렸으나 줄을 잘 못 타는 바람에 49세에 자회사 총무파트로 밀려난다. 줄곧 거기에 있다가 결국 정년퇴직을 맞는다. 주인공 다시로의 말대로 ‘예순 셋, 아직 머리도 팽팽 돌아가고 몸도 건강하고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때’였다.
스스로 레벨이 높은 자동차였던 다시로는 재취업 현실에서 무너진다. 당장 될 것 같은 취업이 생각대로 되지 않자 기대 수준을 잔뜩 낮추어 구직센터가 소개한 작은 업체를 찾아 간다. 명색이 도쿄대 법대 출신에 일본 굴지의 은행 출신이 아닌가! 그럼에도 자존심을 죽이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대표에게 사정하지만 기술도 없는 일류대 출신인 다시로는 거절당한다. 다시로는 도쿄대 교정의 벤치에 앉아 그만 설움이 북받쳐 펑펑 울고 만다.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와 사회가 생각하는 가치가 너무 차이가 컸던 것이다.
다시로의 도쿄대 법대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나이 60세에 서울대 졸업한 사람과 감정평가사에 합격한 사람 누가 일자리를 잘 잡겠는가? 재취업은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뽑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현실적인 요구를 만족 시켜주어야 한다. 다시로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았다.
반면, 그의 아내는 다시로가 자회사로 밀려나는 것을 보면서 미용 기술을 배운다. 남편만을 믿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길을 준비한 것이다. 미용 자격증을 딴 후 경험을 쌓은 뒤, 다시로가 퇴직하자 모아 둔 돈으로 자신의 미용실을 차린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데에 멈추어 있지 않고 실제로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하나 선택해서 능력을 키운 것이다.
한편, 이것저것 여의치 않아 실의에 빠진 다시로는 우연히 피트니스에서 벤처 사업가를 만나 그 회사의 고문 자리를 얻게 되어 의욕에 불탄다. 보수도 괜찮다. 그런데, 사업가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다시로는 그 회사의 대표이사를 맡게 된다. 이전에는 줄을 잘 못 서서 임원을 하지 못했는데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때라고 생각한다. 결과는 대실패. 회사는 파산하고 회사의 차입금 10억원을 다시로가 갚아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이 문제로 아내와 다투다가 별거에 들어간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 가서 지역사회에 봉사하면서 길을 모색하기로 한다. 아내는 귀향 역시 현실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남자들이 흔히 택하는 도피처라고 보았다. 그래서 남편을 따라가지 않는다.
다시로와 그의 아내, 둘 중 누구의 길이 옳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인생 후반에 나의 업(業)을 갖고 싶다면 다시로의 아내가 가진 관점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아내는 중고차 시장에서 차별화의 길을 기술에서 찾았다. 기술은 지금 당장 쓰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재취업이라는 중고차 시장으로 가게 되면 우리는 실리를 추구해야 한다. 숲 속의 열 마리 새보다 손 안의 한 마리 새가 낫다.
출처: 뉴스1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장기신용은행 장은경제연구소 경제실장을 역임했으며, 미래에셋자산운용 채권 CIO와 경영관리부문 대표이사를 거쳐 투자와연금센터(구 은퇴연구소)의 대표를 맡았다. 인구구조와 자산운용 전문가로 주요 저서로는 『데모테크가 온다』, 『벌거벗을 용기』, 『1인 1기』, 『인구구조가 투자지도를 바꾼다』가 있으며 역서로는 『포트폴리오 성공운용』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