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인간관계가 더 넓어졌다
글 : 한혜경 / 작가, 前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2021-06-02
지난번에 은퇴한 후에도 일이 자꾸 생겨서 여전히 바쁘다, 그래서 은퇴한 것 같지도 않다는 이야기를 썼는데, 도대체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내가 만나는 사람들도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었다. 한마디로 은퇴한 후에 인간관계가 더 넓어졌다. 물론 은퇴 전보다 사람을 더 많이, 자주 만난다는 뜻은 아니다. 현역 때는 학생들과 동료들 외에도 사회복지 현장 종사자나 정책 관련자 등을 만났으니까 숫자로 보면 훨씬 많은 만남이 이루어졌다. 또 그때는 코로나 이전이었으므로 사람을 많이 만나면 만날수록 좋다는 분위기였다. 물론 은퇴와 동시에 이들 중 상당수와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끊어졌지만, 아직도 일부는 이런저런 일로 연락하며 지내는 사이이다.
그런데 왜 은퇴 후에 더 인간관계가 넓어진 것처럼 느껴질까? 그건 현역일 때보다 훨씬 다양한 사람을 만나기 때문이다. 현역일 때는 같은 직장, 같은 전공의 사람들, 일과 관련된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놀거나 쉴 때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나 고민을 가진, 한마디로 동질적이고 공통점이 있는 사람을 많이 만났다. 그런데 요즘엔 다양한 배경과 경력을 가진 친구, 선배, 후배, 지인을 만난다. 말하자면 현역 때보다 만나는 사람의 스펙트럼이 훨씬 넓어졌다.
특히 최근에는 현재 문화예술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또 은퇴자 중에도 성악을 배우거나 드럼을 치거나 그림, 목공 등의 다양한 취미활동을 하는 사람 많이 만나다 보니 나까지 덩달아 아티스트가 된 기분이 들 정도다. 만나서도 일 얘기만 하지 않고 세상사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하게 나누다 보니 화제도 풍부하고 재미가 있다. 음악, 그림, 목공 등 창조적인 분야라면 모든 분야에 관심이 있지만, 재능이라곤 손끝만큼도 없는 나로서는 그런 일이나 취미를 가진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지지난 주에도 H 선배님의 아파트에서 열린 기타연주회에 가서 멋진 시간을 보냈다. H 선배님의 남편이자 기타 장인인 최동수 선생님의 모임(평균 연령이 최소한 75살은 되어 보였다)에서 여는 작은 연주회였는데, 이번에 특별히 나를 초대해주셨다. 파리 국립음악원 출신의 최원호 클래식 기타 연주자의 아름다운 음악으로 꽉 찬 자리였고, 음악도 음악이지만 자그마한 아파트 거실의 분위기가 영화에서나 보던 유럽의 '살롱' 못지않게 느껴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이렇게 멋있게 노는 선배님들도 계시는구나.'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틀쯤 후에 그 자리에 계셨던 한 분이 만든 '木 韻의 작은 음악회'라는 제목의 영상자료가 카톡으로 배달되었다. 수준이 훌륭했다. 이거야 원, 80이 넘은 분이 만든 영상이 이 정도라니, 이런 선배들 덕분에 엄청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자극도 받게 된다.그런가 하면 지난 화요일에는 남양주에 있는 실학박물관에서 열린 '실학청연-벗과 사제의 인연을 그리다'라는 제목의 전시회에 매화 그림, 다산이 귀양 가서 머물던 다산초당 그림, 당시 실학자들이 모여서 공부하고 놀던(?) 종로 풍경 등을 그린 이동원 작가와 동행하여 그림을 감상하고 설명도 직접 듣는 호사를 누렸다.
그런데 이렇게 좋고 매력적이고, 다양한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졌나를 생각해보면 다 일과 관련이 있다. H 선배님은 내가 운영하는 '자기 역사 쓰기' 프로그램에서 처음 만났고, 역사 쓰기를 다 끝낸 후에도 당신이 쓰는 글(수필)에 관한 비평과 조언(?)을 요청하셔서 자주 연락하다 보니 이런저런 사적인 이야기도 나누는 사이로 이어진 경우이다. 40대 후반의 이동원 작가는 대학 시절에 친하게 지냈던 L 선배가 운영하는 서울시 여성역사문화공간 ‘여담재’에서 우연히 강의도 하고 이런저런 자문활동도 하는 중에 알게 된 사이이다. 일 때문에 만났지만 깊은 이야기도 나누고 와인 마시며 함께 놀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돕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다시 또 다른 일로 이어지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남편의 친구 관계는 나와 딴판이라는 점이다. 나보다 훨씬 사교적이고 친구 좋아하고 양보심 많은 성격의 남편은 주로 동창들하고 논다. 친구 숫자도 많고 만나는 장소도 다양하지만 거의 동창생 모임이고, 그래서 남편 친구들은 서로서로 다 아는 사이이다. 게다가 남자들의 특성인지 개인적인 특성인지 모르겠지만 자주 만나서 놀면서도 깊은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 아주 가끔이지만, 여전히 경쟁심이 남아 있는지 게임에서 지고 돌아오면 분해서 씩씩거릴 때도 있다.
그러다 보니 남편은 나보다 훨씬 자주 외출하고, 즐겁게 놀다 돌아오지만, 놀이가 일로 연결되거나 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어린 시절부터 알던 동창들이기에 강하고 끈끈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서로에게 큰 위로와 즐거움을 주는 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취미생활에 관한 정보, 건강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는 정도 외에는 함께 모여 뭔가 의미 있는 일을 벌이거나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일자리를 얻을 때 누구를 알고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주장한 사회학자 마크 그래노베터(Mark Granovetter)의 유명한 '네트워크 이론'이 있다. 그는 취업할 때나 새로운 기회를 얻을 때 강한 유대(strong tie)를 가지는 친구보다 ‘친구의 친구’와 같은 약한 유대(weak tie) 관계가 더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린다 그래 튼 등도 <100세 인생>에서 친구들이 알고 있는 정보는 비슷하고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잘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신기한 정보를 많이 접할 수 있다. 그래서 100세 시대에는 크고 다양한 네트워크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위의 네트워크 이론이 은퇴 후 인간관계에도 적용된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물론 내가 취업하려고 노력하거나 새로운 일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누군가를 만나는 건 전혀 아니다. 하지만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났을 뿐인데 그 만남이 우연히 재미있고 흥미로운 일로 연결되는 것, 혹은 반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동시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같이 어울려 노는 것, 이 모두가 은퇴 후의 삶을 풍성하고 신나고 의미 있게 하는 건 사실이다.
해서 도대체 은퇴한 것 같지 않은 이 기분, 여전히 바쁜 데서 오는 이 불편함도 기꺼이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다.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 때문에 생기는 일, 혹은 좋은 만남을 가져오는 일이라면 말이다
한혜경 작가, 前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책임 연구원과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나는 매일 은퇴를 꿈꾼다> <남자가 은퇴할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의 저서를 통해 베이비붐 세대 은퇴자가 겪는 다양한 이야기를 써온 작가이기도 하다 최근의 저서로는 본 사이트에 연재하고 있는 ‘나의 은퇴일기’ 내용을 토대로 한 <은퇴의 맛>, 저자가 진행하고 있는 ‘자기 역사 쓰기 프로그램’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기꺼이 오십, 나를 다시 배워야 할 시간>이 있다.